지난 8월 12일, 경기 남양주 마석 모란공원 묘원에서 고(故) 이범영 한국민주청년단체협의회(한청협) 의장의 32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이날 추모식은 국민훈장 모란장 추서를 기념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동지회, 서울대농법학회, 한청협 옛 동지들이 한자리에 모여 고인을 기렸다.

부인 김설이에게 기증한 이범영 초상화 ⓒ 민청련동지회]
■ 32년 만의 훈장, 그리고 아내의 인사말
이날 묘원에는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옛 동지들과, 아직 앳되고 수줍은 아가씨 한 명이 모였다. 고인의 묘 앞에는 조화 두 송이와 이번에 추서된 훈장·증서가 놓였고, 한청협 사무처장을 지낸 이원영 한양대 교수가 사회를 맡았다. 민청련 동지회를 대표해 장영달 전 의원이, 서울대농법학회를 대표해 양춘승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상임이사가, 한청협 동지들을 대표해 이기동 전 진주민주청년회 초대회장이 추도사를 이었다. 평소 좌중을 웃고 울리던 이원영 교수의 재치조차 더위를 식힐 여유를 만들지 못할 만큼, 자리에는 무거운 공기가 흘렀다.
분위기를 바꾼 것은 아내 김설이 여사였다. 그는 국가가 내린 훈장보다 훨씬 오래전에 동지들이 이미 마음으로 훈장을 건네주었고, 그 덕에 세 모녀가 오랜 세월 든든한 울타리 안에서 지낼 수 있었다며 "덕분에 살아오면서 제 삶이 누추하지 않았고, 남한테 손 내밀지 않아도 됐고, 그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으면서 살 수 있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했다. 이어 살아생전 대접이란 걸 해본 적 없던 남편을 대신해, 이날만큼은 이범영이 동지들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점심을 대접하는 자리라고 전했다.
그때 누군가 던진 한마디가 좌중의 가슴을 두드렸다. "이범영씨보다 나이가 많아요." 올해 마흔 줄을 넘긴 둘째 딸 이승민씨 이야기였다. 여전히 앳되고 수줍은 웃음을 짓는 그는 이제 중년이 되어, 영원히 청년인 아버지의 묘 앞에 서 있었다.
세상을 뒤엎을 기개 대신 그저 그런 장년·노년이 되어버린 옛 동지들 앞에, 마흔의 중년 딸과 마흔에 멈춘 청년 아버지가 나란히 선 셈이었다. 다정한 글과 사진, 연민과 걱정의 조각들로 채워진 이승민씨의 SNS처럼, 불타는 격정 대신 다정하고 끈질기게 이어지는 연대의 삶이었다. 참석자들은 김설이 여사의 인사말과 초연히 서 있는 이승민씨가 없었다면 그저 추모하고 흩어졌을 자리였다며, 이날 자신들이 이미 오래전 이범영에게 훈장을 주었고 이제 그 훈장을 함께 돌려받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고 전했다.
한 동지는 "자리가 영예인 것이 아니라, 자리를 가져야 갚을 수 있는 빚이 있다는 것을 새삼 느낀 하루였다"고 소회를 전했다. 참석자들은 청년의 기개를 잃지 말고, 다정한 이승민씨들 앞에서 영원히 청년으로 남아 그 사랑을 겨레에 바치자고 다짐했다. 헤어지는 길, 초연한 이승민씨의 웃음과 김설이 여사의 다독임이 배웅했고, 그 발걸음 위로 이범영이 즐겨 부르던 노래 '내 사랑 한반도'의 가락이 오래도록 맴돌았다.

32주기 추모식 현장]
■ 유신의 시대를 온몸으로 거스른 청년
이날 훈장과 추모식으로 다시 조명된 이범영 의장은 1955년생으로, 서울대 법대 재학 중이던 1976년 12월 박석운·백계문 동지와 함께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철폐를 요구하며 500여 명 규모의 학생 시위를 주도했다. 국내 언론은 이를 보도하지 못했지만 일본 아사히신문 등 해외 언론에 크게 다뤄지며 침체된 학생운동에 불을 지폈고, 그는 이 일로 2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 스스로를 '직업적 운동가'로 규정한 그는 1983년 민청련 창립 초기부터 조직사업을 맡아, 각 대학 학생운동 출신자들을 잇는 비공개 소모임 '계반'을 꾸리고 운영하는 배후 조직가 역할을 했다. 1985년 3월 집행국장을 맡아 전면에 나섰으나, 같은 해 정권의 대탄압으로 지도부 대부분이 구속·수배되는 상황에서 그도 전국 지명수배자가 되어 오랜 도피 생활에 들어갔다. 도피 중에도 지하에서 조직을 추스르며 <청년운동 시론>과 같은 글을 남겼고, 이 시기는 1987년 6월항쟁 이후까지 이어졌다.
민주화 이후에도 걸음을 멈추지 않은 그는 전국청년단체대표자협의회와 한청협 의장을 맡아 통일운동에 헌신했고, 이 과정에서 다시 구속되기도 했다. 그러나 오랜 투쟁 속에서 얻은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1994년 8월 12일, 담도암으로 마흔의 나이에 눈을 감았다. 지인들은 그를 '부드러운 카리스마', '외유내강형 인물'로 기억한다.
이범영 의장이 세상을 떠난 지 32년, 유신독재와 분단체제에 맞서 싸웠던 '직업적 운동가'의 삶은 중년이 된 딸과 여전히 청년으로 남은 동지들의 기억 속에서 현재형으로 이어지고 있다.

용문사에서 김설이와 두 딸을 만나 찍었다.
네 식구가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



















